공유기에서 우주까지
보라카이의 느린 인터넷에서 스타링크까지, 20여 년 사이 달라진 연결의 풍경
2004년, 필리핀 보라카이에서 두 달 정도 생활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보라카이는 인터넷 환경까지 포함해서 꽤 다른 세상이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라도 한 판 하려고 하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임을 하다가 연결이 불안정해지고, 결국 게임에서 빠져버리곤 했다. 당시 흔히 말하던 표현으로는 '드랍됐다'고 했다. 요즘처럼 어디를 가든 안정적인 인터넷 연결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대에게는 조금 낯선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당시 나는 그 이유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필리핀은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고, 그래서 위성통신을 많이 이용하니 인터넷이 느린 것 아닐까.
그런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면 이 기억에는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필리핀의 국제 인터넷망 역시 해저 광케이블에 크게 의존해 왔다. 따라서 당시 보라카이의 인터넷이 느렸던 이유를 단순히 '위성 인터넷을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다만 7천 개가 넘는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전국 각지와 작은 섬까지 안정적인 통신망을 연결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설명은 충분히 가능하다. 국제망이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그 연결을 지역과 가정, 호텔과 상점까지 전달하는 국내 백본과 마지막 구간의 품질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중요한 것은 정확히 어떤 망을 이용했느냐보다 당시 인터넷을 사용하던 우리의 감각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인터넷을 서로 나눠 쓰면 되지 않을까
몇 년 뒤에는 재미있는 시도가 등장했다.
FON이었다.
FON의 발상은 지금 보아도 상당히 재미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인터넷 회선과 Wi-Fi를 다른 사람에게 조금씩 개방한다. 대신 자신도 여행을 갔을 때 다른 사람이 개방한 FON Wi-Fi를 이용한다.
내 인터넷을 나누어 주고, 다른 사람의 인터넷도 나누어 쓴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 곳곳에 Wi-Fi 접속점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2006~2007년 무렵 FON은 이 네트워크를 빠르게 확대하기 위해 'La Fonera'라는 전용 공유기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당시에는 무료 공유기 배포 프로모션도 있었다. 공유기를 받아 자신의 인터넷 연결 일부를 FON 커뮤니티에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한 생각이었다.
전 세계에 인터넷망을 새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미 각 가정에 인터넷이 들어가고 있으니 그 집의 공유기들을 서로 연결하면 사실상 거대한 무선 인터넷망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후 이동통신망이 급속히 발전했고 스마트폰의 3G, 4G, 5G와 공공 Wi-Fi가 확산되면서 우리가 인터넷에 접속하는 방식은 또 달라졌다.
그렇게 FON에 대한 기억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요즘 스타링크를 보면 가끔 그 시절이 생각난다.
이번에는 공유기가 아니라 위성을 깔았다
FON의 아이디어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인터넷이 있는 곳을 세계 곳곳에 많이 만들자."
그런데 스타링크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풀고 있다.
지상에 접속점을 촘촘하게 만드는 대신 지구 저궤도에 수많은 통신위성을 배치하는 것이다.
기존의 정지궤도 통신위성은 지상에서 약 3만6000km 떨어진 곳에 있다.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신호가 왕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지연시간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반면 스타링크는 훨씬 낮은 지구 저궤도(LEO)에 많은 위성을 배치한다.
하나의 위성이 넓은 지역을 담당하게 하는 대신, 낮게 떠 있는 많은 위성이 계속 자리를 바꾸며 지구를 덮는 방식이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기술적인 설명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이런 식으로 해결할 생각을 했구나.'
2004년에는 작은 섬에서 인터넷 하나 제대로 연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몇 년 뒤에는 사람들이 각자의 공유기를 조금씩 개방해서 세계적인 Wi-Fi망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그런데 불과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아예 수많은 위성을 지구 주변에 배치해 인터넷망을 만들고 있다.
그 시간의 간격을 직접 경험해서인지 스타링크를 보면 단순히 '빠른 위성 인터넷' 이상의 묘한 느낌이 든다.
기술이 발전했다기보다,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규모 자체가 커졌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밤하늘의 저 불빛을 보니 다른 생각도 든다
스타링크 위성이 발사된 직후 밤하늘을 줄지어 이동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이 있다.
처음 보면 꽤 아름답다.
그런데 천문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제천문연맹(IAU)은 저궤도 대규모 위성군이 지상 광학 및 전파천문 관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IAU는 특히 태양빛을 반사하는 위성과 위성이 사용하는 전파가 천문관측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 문제를 단순히 '천문학자들이 별을 보기 불편해졌다' 정도로 이해해서도 곤란하다. 망원경은 사람의 눈으로 밤하늘을 보는 것과 달리 희미한 빛을 오랫동안 노출해 관측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밝은 인공위성이 시야를 통과하면 관측 자료에 흔적이 남을 수 있다.
물론 사업자와 천문학계도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성의 밝기를 줄이고, 위성의 궤도를 예측해 관측을 피하고, 관측 데이터에서 흔적을 처리하는 여러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IAU 역시 산업계와 천문학계가 함께 완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밤하늘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제 밤하늘도 인간이 만들어낸 물체들과 함께 보아야 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혹시 위성끼리 부딪치기 시작하면?
또 하나 떠오르는 걱정이 있다.
이렇게 많은 위성을 올려놓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떻게 될까.
위성 하나가 다른 위성과 충돌해 파편이 생기고, 그 파편이 또 다른 위성을 파괴하고, 거기서 생긴 파편이 다시 다른 위성과 충돌한다면?
흥미롭게도 이런 생각에는 이미 이름이 있다.
케슬러 신드롬(Kessler Syndrome) 이다.
NASA는 궤도상의 물체가 많아질수록 충돌 가능성이 높아지고, 충돌에서 만들어진 파편이 다시 다른 물체와 충돌하면서 더 많은 파편을 만들어내는 연쇄적인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collision cascade', 즉 충돌 연쇄라고도 부른다.
그렇다고 "스타링크 위성 하나가 충돌하면 모든 위성이 연쇄적으로 파괴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케슬러 신드롬은 그렇게 단순한 도미노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특정 궤도에서 물체와 파편의 밀도가 계속 증가하면 장기간에 걸쳐 충돌이 새로운 파편을 만들고, 그 파편이 다시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자기증폭적인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개념에 가깝다.
더구나 우주쓰레기 문제는 스타링크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다. NASA는 오래전부터 로켓 잔해, 수명을 다한 위성, 충돌 파편 등이 저궤도 환경에 축적되는 문제를 연구해 왔다.
그러니 스타링크를 곧바로 '우주 재앙을 일으킬 기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다만 이미 존재하던 우주 교통과 우주쓰레기 문제의 규모를 대규모 위성군 시대에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분명히 남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영화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한 영화가 떠올랐다.
《Don't Look Up》
지구를 향해 거대한 혜성이 다가오자 처음에는 이를 막으려 하지만, 극 중 거대 기술기업 BASH가 혜성에 막대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자원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계획에 개입한다. 결국 BASH의 기술을 이용해 혜성을 처리하려는 계획이 추진되지만 실패하고, 지구는 파국을 맞는다. 일부 권력자와 부유층은 미리 준비된 우주선으로 탈출한다.
물론 이것을 스타링크에 그대로 대입할 이유는 없다.
영화는 풍자이고 스타링크는 실제 통신 인프라다.
그런데 두 이야기를 연결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지점 하나는 있다.
기술이 점점 거대해지면서 한 기업이 내리는 기술적 결정의 영향 범위도 함께 커지고 있다는 것.
공유기 하나를 나누던 시대에는 하지 않았던 질문
FON 공유기 하나를 설치한다고 해서 밤하늘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한 사람이 공유기를 끈다고 다른 나라의 천문대가 영향을 받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만드는 통신망은 지구 저궤도라는 공간까지 사용한다. 그 과정에서 천문학, 우주교통, 우주쓰레기 같은 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이해관계가 생겨난다.
그렇다고 스타링크를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처음 느낀 감정은 경이로움에 가깝다.
2004년 보라카이에서 한국 친구들과 스타크래프트 한 판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사람이 불과 20여 년 뒤 지구 저궤도에 수많은 위성을 띄워 인터넷을 연결하는 시대를 보고 있다.
참 많이 변했다.
다만 기술의 규모가 이렇게 커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이 거대한 시스템은 누가 관리해야 할까.
한 기업이 만든 위성이라도 그것이 사용하는 궤도는 다른 위성도 지나가는 공간이고, 그 위성이 지나가는 밤하늘은 어느 한 기업의 하늘이 아니다.
지금 당장 이 질문에 거창한 답을 내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이번에는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고 싶다.
2004년에는 인터넷에 연결되는 것이 문제였다. 2007년 무렵에는 인터넷을 어떻게 나누어 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리고 이제는 지구를 둘러싼 우주 공간을 이용해 인터넷을 연결하고 있다.
연결의 문제가 하나씩 해결될 때마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어쩌면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의 크기가 커지는 만큼, 우리가 함께 결정해야 할 문제의 크기도 커지는 것.
'누가 지구 저궤도를 관리하고, 어느 정도까지 사용할 수 있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별도의 글에서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볼 만한 주제다. 지금은 그저, 보라카이에서 스타크래프트 한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