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삭제 테스트
지난 6월 한 대학에서 열린 AI 서비스 관련 해커톤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첫날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AI를 활용해 서비스를 개발하는 방법에 대해 특강을 했고, 이후에는 팀별로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제 서비스를 구현하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지도했다.
참가 학생 대부분은 컴퓨터공학이나 AI·소프트웨어 관련 학과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팀원들과 기능을 논의하고, 필요한 기술을 찾아보고, 생각했던 서비스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열심히 작업했다. 짧은 시간 안에 아이디어가 조금씩 실제 서비스의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은 꽤 흥미로웠다.
그런데 여러 팀의 아이디어와 구현 과정을 보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왜 AI여야 하지?
AI를 사용한 서비스와 AI이기 때문에 가능한 서비스
AI를 서비스에 활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AI를 이용해 기존 서비스를 더 편리하게 만들 수도 있고, 업무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검색 결과를 요약해줄 수도 있고, 사용자와 자연어로 대화할 수도 있으며, 기존에는 복잡했던 기능을 훨씬 쉽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AI가 있어서 처음으로 가능해진 것은 무엇일까?
기존 서비스에 AI 기능 하나를 추가하는 것과 AI라는 기술이 등장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른 문제다.
하나는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AI가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해커톤 현장에서 학생들의 아이디어를 보면서 나는 오히려 두 번째 질문에 관심이 갔다.
우리는 계속 반대쪽 질문을 해왔다
AI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거의 항상 그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그렇다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창의력이 필요한 일, 공감이 필요한 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요한 일, 현실 세계에서 복잡한 판단과 행동이 필요한 일.
AI가 빠르게 발전할수록 우리는 AI가 넘어오지 못할 인간의 영역을 찾으려 한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고민이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그 반대편에서 인간에게 남을 영역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해커톤 현장에서 학생들을 보고 있다가 문득 질문을 반대로 해보고 싶어졌다.
컴퓨터공학을 공부하고 AI와 소프트웨어를 공부하면서 앞으로 AI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 사람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할까.
이들에게는 오히려 정반대의 질문이 필요한 것 아닐까.
"AI가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AI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을 찾는 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중요한 질문이라면, AI를 이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 사람에게는 다른 질문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AI가 없었다면 만들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인가.
'AI만이 할 수 있다'는 말의 의미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AI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AI가 하는 일 가운데 상당수는 인간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약도 사람이 할 수 있고, 번역도 사람이 할 수 있다. 상담도 사람이 하고 그림도 사람이 그린다. 문서도 사람이 작성하고 데이터도 사람이 분석한다.
그렇다면 AI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할 수 있다'의 의미를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다.
이론적으로 가능한가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학생 1만 명에게 개인 교사를 한 명씩 붙이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그런데 AI가 학생 1만 명의 학습 기록을 각각 분석하고, 틀린 문제를 파악하고, 학생마다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설명하고, 다음 문제까지 개별적으로 만들어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간에게 원리적으로 불가능했던 일이 아니다.
규모 때문에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고객 상담도 마찬가지다.
상담원 한 명이 고객 한 명의 구매 기록과 과거 문의 내역,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제품의 설명서를 모두 읽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답변한다면 훌륭한 상담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십만 명에게 동시에 그렇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AI라면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고 보면 AI가 만드는 변화는 반드시 '인간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너무 느렸던 것. 너무 비쌌던 것. 너무 많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 너무 많은 정보를 동시에 살펴봐야 했던 것. 사람마다 다르게 제공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컸던 것.
이런 제약 때문에 아이디어로만 존재하던 것이 AI를 만나 현실적인 서비스가 될 수 있다.
그것도 충분히 AI이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비스를 기획할 때 AI를 한번 지워본다면
그날 이후 AI 서비스를 볼 때 나름대로 하나의 질문을 해보게 되었다.
아주 단순하다.
'여기서 AI를 지워보면 어떻게 될까?'
서비스 기획서에서 AI라는 단어를 지워본다.
LLM을 지우고, 추천 모델을 지우고, 생성형 AI를 지운다.
그런데도 서비스가 제공하려는 핵심 가치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면 어떨까.
물론 나쁜 서비스라는 뜻은 아니다.
AI를 이용해 기존 서비스를 더 편리하게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기존 업무의 비용을 낮추거나 속도를 높이고 사용성을 개선하는 것 역시 중요한 변화다.
다만 그것과 AI가 등장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 서비스는 조금 다른 종류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AI를 제거하는 순간 서비스의 핵심 아이디어 자체가 무너진다면 어떨까.
그 서비스는 적어도 기존 서비스에 AI를 붙이는 것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AI가 새롭게 가능하게 만든 능력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혼자서 '==AI 삭제 테스트=='라고 생각해보게 됐다.
아주 단순하지만 AI 서비스를 바라보는 꽤 괜찮은 질문일지도 모른다.
AI를 붙이는 것과 AI에서 출발하는 것
앞으로 수많은 서비스에 AI가 들어갈 것이다.
문서 작성 도구에도 들어가고, 검색에도 들어가고, 자동차에도 들어가고, 가전제품에도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AI 서비스'라는 말 자체가 지금만큼 특별하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때 인터넷을 이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서비스의 특징이었던 시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서비스가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중요한 차이는 AI를 붙였느냐가 아니라 AI에서 출발했느냐가 될지도 모른다.
기존 서비스가 있고 그 위에 AI 기능을 추가할 수도 있다.
반대로 AI가 새롭게 가능하게 만든 능력에서 출발해 이전에는 존재하기 어려웠던 서비스를 생각할 수도 있다.
둘 다 필요하다.
하지만 AI와 소프트웨어를 공부하고 앞으로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 사람이라면 적어도 두 번째 질문을 한번쯤 해보았으면 한다.
AI가 무엇을 대신할 것인가가 아니라, AI가 무엇을 처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그날 학생들을 보며 든 생각
해커톤이 진행되는 동안 학생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실제 서비스로 만들기 위해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어떤 기능을 넣을 것인지, 사용자가 어떻게 이용하게 할 것인지, AI를 어디에 적용할 것인지 팀마다 다른 답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재미있었고, 한편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AI 시대를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AI가 할 수 없는 일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것은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다.
AI가 인간의 일을 어디까지 대신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기 위해 필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AI를 공부하고, AI를 이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 사람들에게만큼은 질문을 한번 뒤집어도 좋지 않을까.
AI가 하지 못하는 영역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AI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리고 묻는 것이다.
AI가 있기 전에는 비용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시간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규모 때문에 하지 못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AI 때문에 처음으로 현실적인 서비스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AI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AI와 경쟁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AI가 열어놓은 새로운 가능성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에 또 학생들의 AI 서비스 아이디어를 만나게 된다면, 나는 아마 가장 먼저 이것부터 묻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서비스는 왜 AI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