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공장에 쌓인 데이터는 누구의 기회가 될까
지난 수년 동안 우리는 ‘스마트공장’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 정부는 제조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생산현장의 디지털화를 대규모로 지원했고, 전국의 수많은 중소 제조기업에 MES, ERP, 센서, 자동화 설비와 같은 시스템이 들어갔다.
당시 스마트공장 사업의 목표는 비교적 명확했다. 종이 작업일보와 엑셀로 관리하던 생산정보를 디지털화하고, 생산설비에서 데이터를 수집하며, 공정과 품질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었다.
2022년 정부는 스마트공장 누적 보급 목표를 3만 개로 잡았으며, 2021년 말 이미 2만5,039개가 구축됐다고 발표했다. 당시 사업은 스마트공장의 수준을 생산정보를 디지털화하는 ‘기초’, 생산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분석하는 ‘고도화1’, 생산공정을 실시간으로 제어하는 ‘고도화2’ 단계로 구분했다.
대구 역시 이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대구시는 2020년 발표한 스마트공장 보급계획에서 지역 내 10인 이상 등록공장 3,316개 가운데 약 55%에 해당하는 1,821개 기업을 2022년까지 스마트공장으로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마트공장의 숫자만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무언가가 지역 제조업체 안에 생겨났다.
데이터다.
DX의 가장 큰 유산은 시스템이 아니라 데이터다
예전의 중소 제조현장을 생각해 보자.
오늘 몇 개를 생산했는지, 어느 공정에서 불량이 발생했는지, 설비가 언제 멈췄는지, 어떤 작업자가 어떤 제품을 생산했는지가 작업자의 경험이나 수기 문서, 엑셀 파일에 흩어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마트공장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생산실적이 MES에 기록되고, 설비 가동시간이 저장되고, 품질검사 결과가 데이터베이스에 남고, 온도·진동·전력량과 같은 센서 데이터가 쌓이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스마트공장이 같은 수준으로 구축된 것은 아니다. 어떤 기업에는 MES만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기업에는 PLC와 센서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으며, 일부 기업은 이미 실시간 분석 단계에 들어가 있다.
그럼에도 이전과 비교하면 결정적인 변화가 하나 있다.
현장에서 일어난 일을 컴퓨터가 읽을 수 있는 형태로 기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DX, 즉 디지털 전환이 남긴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공장을 완전히 바꾼 것이 아니라도 괜찮다.
AI의 입장에서 보면 훨씬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학습하고 판단할 재료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데이터는 쌓였지만, 대부분 아직 판단하지 않는다
여기서 스마트공장의 다음 문제가 등장한다.
데이터가 있다는 것과 데이터를 활용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MES 화면에는 생산량과 불량률이 표시되고, 데이터베이스에는 수년간의 생산기록이 쌓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그 화면을 보고 판단한다면 시스템은 여전히 ‘기록 시스템’에 가깝다.
“왜 어제보다 불량률이 높아졌는가?” “이 설비는 언제 고장날 가능성이 높은가?” “현재 주문량을 고려했을 때 어떤 생산순서가 가장 효율적인가?” “온도와 압력의 어떤 조합에서 불량이 증가하는가?” “지금 나타난 진동 패턴은 정상인가, 고장의 전조인가?”
이 질문에 시스템이 스스로 답하기 시작하는 순간 성격이 달라진다.
DX에서 AX로 넘어가는 것이다.
중소벤처기업부 역시 이미 정책의 방향을 이쪽으로 돌리고 있다. 2025년 발표한 ‘AI 기반 스마트제조혁신 3.0 전략’은 AI 중심 스마트공장 1만2,000개 구축과 제조AI 전문기업 500개 육성을 목표로 제시했다. 정부 조사에서는 중소 제조기업의 AI 도입 장애요인으로 초기 비용 부담 44.2%, 인력 부족 20.5%, 전략 부재 14.9%가 꼽혔다.
더 극적인 수치도 있다.
중기부가 2025년 초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조사 당시 중소 제조기업 가운데 생산현장에 AI를 적용하고 있는 기업은 1.5%에 불과했다. 반면 정부는 KAMP와 제조AI센터 등을 통해 설비 이상감지, 예측, 품질검사와 같은 AI 활용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스마트공장이라는 DX 인프라는 상당히 넓게 보급됐지만, 그 위에서 AI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는 단계는 이제 시작되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간극에 시장이 존재한다.
대구에 흥미로운 시장이 만들어지는 이유
이 지점에서 대구라는 지역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난 스마트공장 사업을 통해 적지 않은 지역 제조기업들이 디지털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 기업들이 해야 할 일은 완전히 새로운 공장을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기존에 구축한 MES와 설비, 센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이 데이터를 가지고 무엇을 판단할 것인가’로 넘어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부품 제조업체라면 공정조건과 불량의 관계를 분석할 수 있다.
금속가공업체라면 설비의 전류·진동·온도 데이터를 이용해 공구 교체시점이나 고장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식품 제조기업이라면 생산량과 재고, 주문정보를 결합해 생산계획을 최적화할 수 있다. 품질검사를 사람이 하고 있는 기업이라면 비전 AI를 연결할 수 있다.
MES에 수년간 생산일지가 축적되어 있다면 자연어 인터페이스를 붙여 경영자나 공장장이 “지난 6개월간 A제품의 불량이 가장 많이 발생한 조건을 찾아줘.” 라고 질문할 수도 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기 전에는 전문 분석 프로그램을 별도로 만들어야 했던 작업 가운데 상당 부분이 이제 자연어 기반 에이전트와 분석 모델의 결합으로 구현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삼성이나 네이버 같은 기업이 이 시장을 가져가지 않을까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이렇게 큰 시장이라면 결국 대기업이 가져가지 않을까?
일부는 그럴 것이다.
실제로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등 대기업들은 이미 상생형 스마트공장 사업에 참여해 왔고, 제조 AX 분야에서도 대기업의 참여는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대기업은 이 시장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시장 전체를 대기업 몇 곳이 표준 솔루션 하나로 차지하기도 쉽지 않다.
이유는 제조업의 특성 때문이다.
같은 자동차부품 회사라고 해도 사용하는 설비가 다르고, PLC가 다르고, 센서가 다르다. MES 공급업체가 다르고 데이터베이스 구조도 다르다. 생산공정의 순서와 작업자의 업무방식도 다르다.
무엇보다 기업이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다르다.
어떤 회사는 불량률 1%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고, 어떤 회사는 설비 고장을 하루 전에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또 다른 회사는 재고를 줄이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제조 AX는 일반적인 업무용 SaaS처럼 프로그램 하나를 만들어 수천 개 기업에 그대로 배포하기 어려운 영역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AI 모델 + 제조데이터 + 기존 MES·ERP + 설비 + 현장 프로세스를 연결하는 작업이다.
이는 기술만 알아서도 안 되고 제조현장만 알아서도 안 된다.
현장을 방문해 데이터를 확인하고, 어떤 데이터가 의미 있는지 판단하고, 기존 시스템과 연결하고, 실제 업무에 맞춰 AI를 구현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은 지역 기업에게 이상한 형태의 기회다
보통 IT 산업에서는 규모가 클수록 유리하다.
소프트웨어를 한 번 만들어 수백만 명에게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조 AX 시장에는 반대의 속성이 존재한다.
시장 전체는 크지만 개별 프로젝트는 작고, 고객은 수없이 많으며, 고객마다 요구사항이 다르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이것이 불편한 시장일 수 있다.
하지만 지역의 중소 소프트웨어 기업, 스마트공장 공급기업, 자동화 기업, AI 스타트업에는 오히려 진입점이 될 수 있다.
공장 1,000개에 동일한 AI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10개 기업의 공정을 깊게 이해해 각각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공통 모듈을 만들어 다시 30개, 50개 기업으로 확장하는 방식이다.
예지보전 모듈, 비전검사 모듈, 생산계획 최적화, 품질 이상탐지, MES 자연어 질의, 공정 데이터 분석 에이전트, 설비 매뉴얼과 정비이력을 활용한 RAG,
ERP·MES·센서를 연결하는 AI 에이전트 등 수많은 작은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장에서는 거대한 파운데이션 모델을 직접 개발할 필요도 없다.
이미 존재하는 모델과 오픈소스 기술을 이용해 ‘어떤 제조 문제에 어떻게 연결하느냐’가 경쟁력이 된다.
진짜 병목은 AI가 아니라 데이터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한 가지 착각해서는 안 된다.
공장에 데이터베이스가 있다고 해서 AI를 바로 붙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비 이름이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을 수도 있고, 센서 데이터에 결측값이 많을 수도 있고, 불량코드 입력 방식이 작업자마다 다를 수도 있다.
MES 데이터와 ERP 데이터가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데이터는 수년간 쌓였지만 그 데이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할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정부가 제조데이터 표준화 사업을 별도로 추진하고, 2026년에도 AI·빅데이터 분석을 위한 제조데이터 가공과 품질검증 사업을 운영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향후 제조 AX 시장에서 실제로 필요한 기업은 단순히 “AI를 잘하는 회사”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공장의 데이터를 읽을 줄 알고, 제조공정을 이해하며, 기존 시스템을 연결하고, 그 위에 AI를 얹을 수 있는 회사다.
이 능력은 생각보다 희소하다.
5년 전의 스마트공장이 이제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스마트공장 사업을 처음 바라볼 때 그것은 제조업의 디지털화 정책이었다.
MES를 구축하고, 센서를 설치하고, 엑셀을 웹 시스템으로 바꾸고, 생산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넣는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AI가 빠르게 발전한 지금, 과거의 투자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때 설치한 센서는 이제 AI의 입력장치가 될 수 있다.
그때 구축한 MES는 AI 에이전트가 접근하는 업무 시스템이 될 수 있다.
그때부터 축적한 데이터베이스는 예측모델을 만드는 학습 데이터가 될 수 있다.
즉 스마트공장 사업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지역 제조업의 AX를 위한 기반시설을 미리 깔아 놓은 셈이다.
DX가 데이터를 만드는 단계였다면, 이제 AX는 그 데이터로 판단하는 단계다.
대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은 공장이 아니라 ‘학습 가능한 현장’이다
대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AI 연구소의 숫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수년 동안 스마트공장 사업을 거치며 디지털 시스템을 경험한 수많은 중소 제조기업, 그 안의 생산설비와 데이터, 그리고 현장에서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가 더 중요한 자산일 수 있다.
AI 산업에서는 흔히 GPU와 데이터센터, 거대한 파운데이션 모델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나 산업이 확산되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다른 종류의 시장이 등장한다.
기술을 실제 산업현장에 연결하는 시장이다.
그 시장에서는 세계 최고의 AI 모델을 만드는 능력보다
어떤 설비에서 어떤 데이터를 가져와야 하는지,
어떤 데이터가 불량과 관계있는지,
어느 업무를 자동화하면 투자 대비 효과가 큰지,
기존 MES와 ERP를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조업의 AX는 서울의 거대한 AI 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대구와 같은 제조도시에서 더 많은 실제 문제가 발견될 수 있다.
DX 때 설치한 시스템이, AX 시대에는 시장이 된다
5년 전 우리는 공장에 시스템을 넣었다.
그 시스템은 데이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아직 대부분 잠들어 있다.
AI가 등장하면서 이제 그 데이터를 이용해 공장을 기록하는 시스템에서 판단하는 시스템으로 바꿀 수 있는 기술적 조건이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에 정부의 제조 AX 정책과 자금이 움직이고 있다. 제조AI 전문기업을 지정해 자금·인력·판로를 집중 지원하는 정책도 추진돼 왔으며, 정책금융의 경우 기업당 최대 100억원 규모의 융자·보증이 언급된 바 있다. 다만 이것은 ‘스마트공장 한 곳에 100억원의 구축비를 지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제조AI 전문기업을 대상으로 한 융자·보증 등 금융지원 한도라는 점은 구분해야 한다.
나는 이 지점이 흥미롭다.
AI 시대의 거대한 기회가 반드시 새로운 데이터센터나 새로운 파운데이션 모델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우리 주변의 작은 공장들 안에 수년 동안 조용히 쌓여온 데이터가 다음 시장의 출발점일지도 모른다.
대구의 스마트공장은 끝난 사업이 아니다.
DX가 1막이었다면,
이제 그 위에서 시작될 AX가 2막이다.
그리고 그 두 막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기업들에게, 앞으로 몇 년은 예상보다 훨씬 큰 기회의 시간이 될 수 있다.